아직 여름도 아니고 방학도 시작되기 전이 었을 때, 학교 시청각 교육원에서 이 영화를 보았다. 크레딧이 다 올라가고 귀에 끼고 있던 헤드폰을 벗고 건물 밖으로 나가면, 오늘은 날씨도 좋고, 이제 곧 점심시간이니까 분수대 앞에는 사람들 많고 시끄럽겠지. 영화의 감흥이 너무 커서 거기 앉아 친구를 기다리고 있으면 진짜 혼자인 기분이 들꺼야. 뭐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러고 나가서 뭉게구름 떠 있는 쾌청한 하늘을 보고있자니 어느새 나는 아무 생각도 없으면서 그냥 아무 것도 아닌 것들로(아마 영화 속 포틀랜드의 먹먹한 하늘 색으로) 잔뜩 부풀어 있었다.
영화를 보며 나는 내가 모르는 너의 시간에 대해 생각했다. 나와 함께 있지 않을 때의 너희들의 시간. 너희가 혼자 걷고 있는 동안의 시간. 이런 생각이 든 까닭은 이 영화가 인물들 각각의 시간을 조합하는 방식으로 사건을 꾸려나가기 때문이다. 컬럼바인 고교의 총기난사사건(http://terms.naver.com/item.nhn?dirId=799&docId=7505)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학교라는 공간 속에서 가해자와 피해자(실제로 보고있자면 경계가 모호하지만 일단 총 쏜 애가 가해자고 맞은 애가 피해자라고 해두자)들 각자가 가지고 있는 시간과 동선을 맞물리고 적당히 몇번의 방점을 찍으므로써 입체적으로 거의 완벽하게 한 세계와 사건을 조형해낸다. 일반적으로 이야기에서 사건은 시간에 따라 전개된다. 그러나 여기서 사건은 전개되지 않는다. 그것은 개연성 없이, 감정과 우연들의 만남으로 인해 벌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완벽한 묘사가 아니라 완벽한 조형이 되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평면이 아니라 입체이기 때문에.
인물들 각각의 시간. 시간은 결국 존재와 연결된다. 영화는 존재를, 그들 각자의 세계를 온전히 드러내기 위한 방법으로써 뒷모습과 이름을 사용한다. 인물의 이름이 먼저 화면에 뜨고 곧 이어 카메라는 인물의 뒤를 따른다. 포커스가 배경에 부드럽게 맞았다 나가고 어떤 소리는 들리고 어떤 소리는 뭉개지고 어느 순간 시간은 느려지고 음악이 배경에 깔렸다가 사라진다. 스크린 바깥 우리의 세계와 같다. 사람에 따라 어떤 소리는 듣고 어떤 소리는 못듣는다. 때때로 마음 속에 음악이 흐르기도 한다. 생각의 경로에 따라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다. 이처럼 같은 시간에 같은 공간에 있어도 그 안에 존재하는 시간은 각각의 시점들에 따라 수 없이 많다. 영화는 그 모든 시점들을 존중한다. 주연과 조연을 구분하려 하지 않는다. 공평하다.
그리고 그 뒷모습. 누군가에게 내 얼굴을 인식시키기 위해서는 내 앞모습과 옆모습, 눈코입의 생김새를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생김새, 키나 몸무게 따위가 타인들에게 제공하는 인상은 얼마나 가볍고 표면적인 것인가. 그러니까, 사실 내 증명사진의 경우, 내 얼굴 생김이 그렇게 생겼을지는 몰라도 그 사진에는 전혀 나다운 것이 없다. 그것이 의식하고 억지로 지어낸 표정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내 지인들은 걸음걸이로 더 쉽게 나를 알아본다. 영화 하나 그리고 둘에서 소년은 묻는다. "왜 우리는 자신의 뒷모습을 볼 수가 없는거죠? 왜 우리는 반쪽 진실 밖에 볼 수 없나요?" 즉, 누군가의 뒷모습과 그 걸음걸이(혼자 걸을때의)는 무의식의 영역에 속해있는 반쪽 '진실'이다. 인물의 뒤를 따르는 방식의 촬영은 관객이 인물과 같은 시점을 지님으로써 그들의 시간을 최대한 직접적으로 체험하게 할 뿐만 아니라 뒷모습에, 무의식에 실린 그들 존재의 본질을 전해주는 것이다.(ㅠ 이토록 추상적인 단어들로 밖에 표현할 수 없다니. 짜증나.)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스테디캠의 유연함과 그 안의 동선들은 삶의 리듬을 고스란히, 과장없이 아름답게 드러낸다.
그러나 영화는 사건에 대한 사적인 감상과 미학적 실험으로, 아름다움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영화가 훌륭한 까닭은 희생자들의 죽음을 한 없이 무겁게 다루며 동시에 이에 대한 사회의(어른들의,미국의) 책임또한 작위적이지 않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삶의 소중함을 말하기 위해서는 다시 시간을 언급해야한다. 미래야 말로 삶이 가치있는 유일한 이유이다. 그것은 곧 가능성이고 그 희망이 현재를 계속 이끌어 나가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인물들의 현재에는 미래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를 테면 일라이에게는 인화하기로 한 사진이, 브리트니와 조던, 니콜에게는 가려던 쇼핑이, 미셸에게는 내일 억지로 입어야 할 체육복이, 네이트와 캐리에게는 가기로 한 파티가 있었다. 그러나 방아쇠가 당겨지는 순간, 그 모든 것들은 그냥, 없어진다. 미셸의 마지막 시퀀스는 그녀가 철컥 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보는 순간 끝난다. 거기가 그녀 삶의 끝이다. 그게 다다. 죽음은 손 쉽고 보잘 것 없을 수록 무겁게 다가온다. 그 무의미함이 우리 삶의 가장 근본적인 공포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죽음은 하찮고 쉽고 가볍고.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무겁다.
이어서 에릭과 알렉스가 이런 일을 저지르게 되는 까닭. 영화는 그 이유로 그다지 참신한 답을 내놓지 않는다. 사실 이 정적이며 건조한 영화가 보여주는 10대들의 일상은, 같은 소재로 정반대에 위치한 듯한, 뚜렷한 메세지를 담고있는 선정적인 다큐멘터리 볼링 포 콜럼바인이 제시하는 바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고 우습게도, 어느 쪽이 더 다큐멘터리에 가까운지도 잘 모르겠다.) 그 애들은 학교에서 소외당하는 왕따였다. 경제적으로 모자람은 없지만 어른들은 그들에게 무관심했다.(아버지가 알콜 중독자인 존의 경우, 어른은 오히려 아이들에게 보호받아야 하는 대상이었다. 그리고 이 아이는 살아남는다.) 땡땡이를 치거나 말거나. 왕따를 당하거나 말거나. 아이들은 집에서 폭력적인 총격 게임에 몰두했고 불행히도 미국은 그런 평범한 아이들이 인터넷으로 손쉽게 총기를 살 수 있는 나라였다. 그래서, 살면서 키스 한번 못해본, 즉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했다고 느꼈던 에릭과 알렉스는 그냥 한 번 놀아보자고 학교에가서 사람들을 쏴죽였다. 단 한명이라도 이 들을 사랑해 주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리라. 자신의 삶이 가치 없다고 느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역시 우리는 어느 정도 관계에 기대야만 살아나갈 수 있다.
실제 사건을 이토록 슬프고, 공포스럽고 아름다우며 현장감 있게, 거기에다 사회문제적 화두들까지 어렵잖게 배경에 채워내며 재현하다니. 카메라, 영화로만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사회는 분명히 개인들의 집합, 그 이상으로써 존재한다. 우리 모두가 서로를 사랑하는게 불가능 하다면, 결국 그 역할을 사회에게 위임하는 수 밖에 없는데 어떻게 공포에 맞설 것인가. 결국 이 영화의 리듬감이 화양연화에서 음악과 맞물려 좁은 공간을 오가는 인물들의 곡선이 담고있던 리듬감 보다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까닭은(이게 왠 뜬금없는 비교냐만은 두 영화의 느릿한 리듬감이 왠지 비슷하다.) 자연스럽게 보는이로 하여금 앞 문장과 같은 문제제기를 하게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이 영화의 아름다움은 섹시하지 않다. 그렇지만. 스크린 너머 한뼘 뒤 어딘가의 진실을 담고 있다. 게다가 생략과 추상이 손쉽게 예술로 승화되는 이 시대에, 이 영화는 직접 코끼리 코, 귀, 다리, 몸 하나하나를 모두 직접 더듬어 보고 그 결을 찬찬히 옮겨서 정밀 묘사에 성공했다. 그 치밀함과 부피감에 박수를 보내야 한다. 덕분에 영화를 보는게 아니라 체험한다는 새로운 감각을 깨달았으니. 마지막 장면. 그 묵직함이 온 마음을 누른다.
(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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