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가는 이야기들을 좋아했다.(지금도 좋아하지만) 까뮈의 이방인이나, 폴 오스터의 젊은 시절이 반영된 몇몇 이야기들. 굴러 떨어지는 이야기들. 개 중 가장 상징적이고 단순했던 것(삶,생존을 위한 제의처럼 보였던)은 연극 쥐새끼였다. 완벽하게 굴러 떨어지는 이야기였는데 대강의 스토리는 다음과 같다. 평범한 두 남녀가 데이트를 한다. 남자는 서로를 알아야만 사랑할 수 있지 않겠냐며 서로를 하나하나씩 분해해서 알아보자는 제안을 한다. 그래서 두 남녀는 먼저 물질들을(가장 무가치한 것) 다음으로는 추억과 관계들을(좀 더 가치있는 것) 그리고 마침내는 언어와 이름을(인간으로써 존재하기 위한, 소통을 위한 최소한의 필요조건) 해체시켜 버리며 모든 구속에서 벗어나 사랑을 나누지만 결국 허무한 죽음에 이른다. 이처럼 완벽한 자유, 완벽한 고독은 죽음 뒤에나 있다. 수 많은 이들이 삶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해왔지만 그 누구도 성공할 수 없었던 까닭은, 모두가 그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도 그 밖, 삶 너머(죽음 안)에서 관찰자가 될 수 없었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확신할 길 없는 1인칭 주인공 시점뿐, 3인칭 시점은 허락되지 않았던 것. 그래서 많은 예민한 영혼들이 죽음의 아름다움을 동경하고 그것에 이끌려 간 것이다.(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이를 테면 영화 인 투 더 와일드의 주인공처럼.
물론 그는 죽음을 지향하지 않았다. 반대로 그는 삶을 지향했다. 뜨겁게, 직선적으로, 그것을 사랑했다. 그러나 삶에 대한 정복욕은 실은 죽음을 정복하겠다는 욕구와 다르지 않다. 삶을 정의내리는 것, 존재하게 하는 것, 영화의 한 구절을 빌리자면 삶에 올바른 이름을 붙여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죽음이기 때문이다. 이는 절대적인 진리다. 그러나 그 삶이 너무 찬란하고 아름다웠기에 그는 이를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이 영화는 굶주림 없고, 건강하고, 영민하고, 진심으로 관계를 나눌 줄 알고, 거부받은 적 없었던, 아프리카에게 미안해할 줄 아는 한 미국인 젊은이의 거꾸로 가는 여행기다. 그가 짊어 진 고통은 자기 탄생의 지저분한 뒷 이야기(불륜과 수치), 자기 존재의 원인인 부모들의 몰염치에서 비롯된 정체성의 고민이었다. (나는 아직도 사람을 분석할 때 그의 상처를 들여다보는 것 이상의 섬세하고 정확한 방법을 찾지 못했다. 좀 더 아름답고 윤리적으로 올바른 방법이 있다면 좋겠지만) 그래서 그는 삶을 향해, 삶으로부터 뒷걸음질 친다. 도시들, 자본, 시스템 즉, 모든 타인들(사회와 관계)로부터, 무엇보다 가족들로부터. 그렇게 홀로 남으면, 온전하게 존재를 위해 존재할 줄 아는 자연(自然) 속에서, 그 자연처럼 존재한다면, 진정한 삶이, 모든 거짓들로부터 벗어난 진짜 자기 자신이 거기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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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그가 조금만 덜 사랑받았더라면, 고독의 찬란함은 모르고 외로움의 비참함과 그리움의 아름다움을 알았더라면, 그리하여 관계와 소통의 가치를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만약 그랬더라면 그가 그 자신으로써 존재할 수 있는 건 타인들/관계들이라는 넓은 지반 위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개별성은 보편성이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개념이라는 것을, 자기 자신이라고 믿었던 것이 실은 수많은 타인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또한 이 사실이 비극이 아니라는 것을) 자연은 그를 풍성하게 채우지만 그에게 귀 기울일 줄은 모른다는 것을, 진정한 삶은 찾아나서야 할 대상, 즉 그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제와 오늘과 내일, 이 모든 시간들 그 자체라는 것을, 그는 한 번도 삶 바깥에, 가짜 삶 속에 있었던 적이 없으며 삶은 말 그대로 살아간다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을, 이미 그 안에 있고 동시에 그를 품고 있는 것임을, 굳이 그렇게 죽음 가까이까지 가지 않아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가 볼 수 있는 것이라면 그 무엇도 허상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이를 테면, 거기있는 너, 같은 것.
우리를 성장시키는 건 고통이지만, 우리를 존재하게 하는 것은 관계뿐이다 : 어느 순간 자리 잡은 내 삶의 절대적인 명제. 좀 처럼 확신못하는 나지만 이 생각은 변함도 없고 오히려 내 안에서 더 큰 권위를 키워나가고 있다. 고통 없는 관계는 위선적이고 관계를 벗어난 고통은 비참하고 무의미하다. 이 둘은 언제나 함께 존재해야만 한다. 그리고 둘이 만났을 때, 사랑이 되고 희망이 된다. 언젠가 그랬는데, 사랑과 희망의 이 같은 연약함이 아름답다고. 영화 속 그가 가지고 있었던 사랑들은 진실되고도 충만한 것들이어서, 그는 그 가치를 인식하지 못하고 떠나갔지만, 마지막 순간, 햇빛이 그를 비출 때의 그 사랑은 가장 연약한 것이었다. 여러모로 너무 ‘잘’ 만들어서 자칫 ‘저건 꿈이고 픽션이고 내 두 발만으론 갈 수 없는 먼 대륙의 이야기야’라고 생각하게 만들어 버릴 것 같았던(가져보지 못한 것은 의심하고 보는 꼬인 마음...헷) 이 여행기에 대한 의심이 그 순간 녹으면서, 핑, 돌았다. 인생은 사랑이다.
쓰고보니 영화 감상은 없고 사족만 남았다.
거창하고 맥없고 작년부터 동어반복인 내 인생론.
큽. 늙은이인척 하기.
그러니깐, 이제 자리 털고 일어나서 이걸 밑천 삼아 어디로 갈꺼냐며. 정말 당최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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